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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동향 - 과학기술 50년사 중에서 “반도체기술” 분야 (1)

과학기술 50년사 중에서 “반도체기술” 분야 (1) 유 현 규 (반도체공학회 수석부회장)   제 1 절  반도체 산업 현황 2014년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 생산규모는 약 584억 달러로서 세계시장 3,360억불의 약 16.5%를 차지하였으며 2013년을 기점으로 일본을 추월한 이래 2016년 까지 반도체 생산국 세계 2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산업협회 2016 현황자료). 한편 반도체 수출은 지난 1995년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4%를 차지 한 이래 지난 20년간 꾸준히 10%대의 비중을 차지하면서 수출 1위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하였고 GDP 비중 역시 5~6% 대를 유지하는 등 우리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계속 증가해 왔다. 반도체 소자, 장비, 설계 등 약 900여개의 업체에 종사하는 종사자는 2014년 현재 약 13만 8천명 (간접인력을 포함 할 경우 약 40만명)으로 파악 되고 있으며 각 분야에 필요한 신규 인력 약 7,000명의 공급과 실무교육 강화를 위해 대학 및 세부 분야별 전문센터 등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2015). 이 같은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외형은 메모리에서의 절대적 우위와 스마트폰, TV 등 세트업체들의 선전에 힘입은 바 크지만 세계반도체 시장의 60%이상을 차지하는 시스템반도체에서는 그동안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3~5%내외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도체기술의 도입은 그 개척자인 미국은 물론, 우리를 둘러싼 일본, 중국, 대만 등 주요 경쟁국들에 비교하여 약 10~20년 늦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뒤쳐진 후발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 동안 이 같은 외형의 급성장이 가능했던 요인은 국가의 확고한 기술개발 정책수립과 지속적인 실행, 산업체의 탁월한 선택과 과감한 투자, 꾸준한 R&D에 따른 직-간접적인 성과 및 저변확대, 우수 인력의 유입 및 육성, 엔지니어들의 투지 가득한 사명감과 근로자의 근면 성실함, 국제 환경변화에 대한 신속한 대응 등의 요인들이 결합되면서 도출된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1947년 미국 벨 랩이 트랜지스터 소자를 발명한 이래 미국을 시작으로 일본, 그리고 한국 등이 뒤따르면서 70년의 반도체산업의 역사를 써왔다. 이제 우리 앞에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두 가지 큰 변수가 등장했다. 무어의 법칙으로 지속되어왔던 집적화 추세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기술적 변수와 함께 반도체 수요와 공급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의 등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반도체소자가 처음으로 발표된 시점이 1966년이었으니까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이다. 세계 2위의 반도체강국으로 성장한지 채 5년도 되기 전에 우리는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되었다. 50년의 발전경과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전망하는 일은 그러므로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과정이라 하겠다.   제 2 절  반도체기술의 개발과정 및 주요성과 태동기 (1965~1973) 반도체기술의 발전으로 반도체부품의 수요가 폭 넓게 확대되어 감에 따라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단순조립 비용을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60년대 중반부터 한국을 주목했다. 양질의 값싼 노동력도 매력이었지만 무엇보다 조세감면의 특혜를 주는 “외자유치법”이 1966년 8월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1965년 12월 합작투자형태로 미국의 코미 (Komy)가 설립한 “고미전자산업(주)를 필두로, 1966년 4월 Fairchild Semikor, 같은 해 7월 시그네틱스 코리아, 12월 한국마이크로전자 ㈜에 이어 1967년에는 모토로라, IBM 코리아, 컨트롤데이터코리아, 셋방전자 등 73년까지 미국 11개사, 일본 7개 업체가 설립되어 반도체 조립생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조립생산 (패키징) 시장의 성장과 외국투자기업의 러시현상을 주목하던 아남산업은 국내자본으로는 처음으로 앰코일렉트로닉스와의 협력을 통해 1969년 반도체 패키징 사업을 시작한다. 급증하던 시장수요로 인해 1970년 첫 샘플을 생산 한 이래 10년이 되던 1979년 9월 아남은 수출실적 1억8,283만불이라는 놀라운 실적을 달성한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2012년, p.18). 한편 반도체의 가장 큰 수요처인 전자산업은 1964년 상공부가 선정한 13개 중점 육성 수출산업에 포함되면서 반도체산업보다 한발 앞서 국가적 관심과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한다. 금성사는 1959년 11월 진공관으로 만든 국산라디오 A-501를 처음 생산한데 이어 이듬해 트랜지스터형 라디오 TP-601을 처음으로 출시하였으며 1966년 8월 흑백 TV VD-191을 출하하는 등 국내 전자산업의 태동기를 주도해 나갔다 (서현진, 2001, p.75). 삼성전자는 이보다 약 10년 늦은 1969년과 1970년에 일본과 2개의 투자 합작형태로 전자산업에 합류한다.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된 후 74년까지 아남산업, 한국도시바 (KEC 전신), 동남전기, 삼양전기, 대한전선, 오리온 전기, 대우전자, 흥창 등 연 평균 30여개의 회사가 전자산업에 신규 투자하면서 전자산업 중흥의 본격적인 기반을 다져나가게 된다. 비록 대부분이 비 산업용 전자제품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라디오와 TV 뿐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에어콘, 전화기 등 점차 전자제품군이 확대되어 갔다. 정부의 국산품 사용에 대한 적극적인 장려와 지원정책에 힘입어 이들 제품의 생산규모가 크게 증가하고 있었지만, 부품을 전량 수입하여 제작하는 형태로는 전자제품의 경쟁력 확보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면서 핵심부품인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처럼 반도체의 중요성과 기술저변이 확대되어 가는 가운데, 원자력연구소 전자공학 연구실팀은 “프래너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의 試作” [제1보]와 [제2보]를 전자공학회지 1966년 4월과 12월호에 연이어 발표한다 (정만영 외, 1966) 이들이 개발한 반도체소자는 1인치 실리콘 웨이퍼를 사용하여 제작한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로서, 최소선폭 44μm에 소자이득은 약 30~70정도 이었다. 제 2보의 서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띈다. “ ~ 전자공업계의 또 하나의 혁명을 불러 올 것이 기대된다. 한국도 이런 경향을 외면하고 유구한 5천년의 역사만 뒤질 수 없다. 우리들도 이런 혁명에 참여하고 전자공업의 부흥을 꾀해 보려는 심정이 간절하다 ~“. 이는 학술논문이 아니라 마치 전장을 나서는 병사의 각오처럼 들리지 않는가? 흥미로운 점은 이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968년 5월에 대한전자공학회와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집적회로 (IC: Integrated Circuit) 세미나”를 그것도 6일간 집중적으로 개최하였다는 점이다. 공개강좌의 내용도 IC의 기본, 설계, 제작, 응용, 박막, 및 신기술 등 IC의 모든 소요기술을 총망라한 것 이었다 (대한전자공학회, 2016, p.630). 라디오와 일부 전자부품을 조립 생산하던 60년대 초 중반의 초보적인 전자산업 단계와 반도체라는 용어에 이제 겨우 익숙해져가는 수준에 불과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개별소자를 너머 반도체 IC의 중요성과 가치를 간파한 초창기 개발자들의 선견과 열의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1966년 2월 KIST가 설립되면서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국가의 반도체 기초연구는 KIST 전자장치연구실로 모여진다. 특수 다이오드, 고주파 트랜지스터, MOSFET, MOS-IC, Linear IC, 및 Digital IC 등의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1973년에는 미국 GE사에서 사용하던 소규모 반도체 생산장비를 도입하여 TV용 반도체개발에 착수한다. 이듬해 1974년에는 페어차일드의 반도체장비를 추가로 기증받으면서 이 연구실은 반도체개발센터로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된다. 그즈음 KIST가 반도체 생산시설을 운영하는 것이 타당한 가에 대한 주장과 함께 별도의 독립된 기관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이 정부의 관련 정책과 맞물려 검토되었으며 이에 따라 KIST 반도체연구센터는 1976년 구미에 설립되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 (KIET: Korea Institute of Electronics Technology)의 반도체부문으로 흡수되어 보다 발전적 모습으로 거듭난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2007, pp.48~49). 기반 구축기 (1974~1983) 1974년 10월 7일, 부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웨이퍼 가공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국내 KEMCO와 미국현지법인 ICII 각각이 50만불씩 총 100만불의 자본금으로 1974년 1월 26일 설립된 한국반도체(주)는 정부인가를 받은 지 9개월도 채 못 되어 첨단 웨이퍼가공 생산시설을 완공한 것이다. 반도체조립과 웨이퍼 가공의 차이를 잘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특수한 시설공사와 생소한 공정장비도입 과정 하나하나에 많은 고충이 있었지만 이처럼 빠른 시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완공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회사가 목표로 했던 제품이 당시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했던 전자시계 칩이었는데 이를 첨단 공정인 메탈 게이트 CMOS로 3인치 웨이퍼를 사용하여 생산한다는 점이다. 대기업마저 본격적인 진입을 망설이고 있던 판에 이 같은 재미 반도체전문가 개인의 열정과 당찬 생산계획은 한편으로 무모하게 보여 지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반도체 관련 업계의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부인 할 수가 없다. 한국반도체는 1975년 9월 LED 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인 KS-5001개발에 성공하여 양산개시 3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한다. 세계에서 4번째로 전자시계용 칩 생산국이 된 것이다. 한해 뒤인 1976년에는 약 418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73년 불어온 오일쇼크에 따른 급격한 경기침체, 상품수요의 급변, 추가투자의 실패 등 몇 차례의 굴곡을 거치면서 한국반도체는 극심한 경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전자산업 핵심부품의 국산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삼성은 74년 50%, 77년 잔여 지분 50%까지 모두 인수한 뒤 1978년 3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변경한다. 오늘날의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문의 뿌리가 된 것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2012년) 외자투자의 급작스런 위축, 국내임금의 상승과 기업들의 혼란 등을 경험하면서 시장환경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독자적인 기술기반확보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다. 1977년 제 4차 경제개발계획 5개년 계획 수립에 앞서 전자산업과 수출을 총괄하던 상공부는 ‘전자기술연구소’ 발족을 착실하게 준비해 오고 있었는데, 이 계획은 1976년 9월 열린 경제간담회에서 처음으로 공식화하였으며 곧 이어 1976년 12월 30일 KIET가 상공부 산하 연구기관으로 공식 출범한다. 발족당시 연구소 반도체부문의 인력은 KIST 반도체기술개발 센터의 연구진이 주축을 이루었다. 연구소에 부여된 임무는 연구개발에 그치지 않고, 제품의 제조와 시험생산을 통한 전자산업의 지원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KIET 설립이 공식화된 직후인 1976년 11월 정부는 IBRD 차관을 신청하였으며 그 후의 두 차례 타당성 조사를 거쳐 1979년 3월 2,900만불의 차관도입 협정이 체결된다. 1981년 10월 가동한 KIET 반도체시설은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첨단 웨이퍼가공 시설이었다. 시설공사와 병행하여 KIET가 생산 할 반도체 품목에 대한 검토도 진행되었다. 때 마침 미국 VTI 사는 게임 칩에 필요한 32K ROM의 일괄공정기술을 구축한 신생회사로서, 그들 칩을 추가 양산할 공장을 물색하던 중이었으며 KIET로서도 VTI가 제안한 ROM이 가장 현실성 있는 제품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KIET는 1982년 초 VTI 사의 기술을 도입하여 ROM 설계, 개별공정, 양산기술, 및 시험 등 포괄적인 개발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10월 25일, KIET는 국내 최초로 32K ROM 개발에 성공한다. 그러나 연구진들이 축배를 들기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VTI 사에 칩을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보장수율 36%의 확보였다. 국내 처음으로 시도하는 첨단 반도체 칩의 수율 향상을 위해 KIET 연구진 모두는 밤낮없이 매 달렸다. 1983년 1월 수율이 드디어 10%대를 넘으면서 그해 4월 마침내 국제수준급인 평균 44%, 최고 60%까지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개발기술 일부는 VTI 생산라인에 역으로 적용되는 사례도 발생하는 등, 짧은 기간에 이룩한 이 같은 성과는 고객인 VTI 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32K ROM 양산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KIET 연구진은 같은 해 5월 4.5μm선폭의 64K ROM 개발에도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VLSI 시대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단숨에 세계 7위권의 반도체생산기술 보유국으로 뛰어오르게 했다. 상기의 제품기술은 여전히 미국과 일본에 비해 약 2~3년의 격차가 있기는 했지만 32K, 64K ROM의 연이은 성공은 투자에 망설이고 있던 산업계에 기술개발의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반도체산업의 붐을 조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로 보고 있던 IBRD측에 1983년 KIET 반도체시설 매각계획이라는 당황스런 소식이 전해진다. 시설 매각에는 복합적인 배경이 있다. ROM 대신 DRAM이 메모리의 주류로 등장하면서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마이크론사의 기술도입을 통해 64K DRAM 기술개발에 돌입한 반면, KIET의 반도체 장비는 벌써 다음세대의 장비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이미 민간기업에서 반도체 투자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계속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추진된 연구소 통폐합 방침에 따라 KIET는 주무부서가 상공부에서 과기부로 바뀌게 되었고 통합을 위해 대전으로 이동해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IBRD의 설득과 반도체 생산시설의 민간매각이 이루어지면서 구미에 있던 KIET는 이미 대전에 자리 잡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와 통합하여 한국전자통신연구소 (ETRI: Electronics and Telecommunication Research Institute))라는 이름으로 1985년 3월 26일 새롭게 출범한다. 반도체생산시설 매각에는 대우통신과 금성반도체가 경합을 붙었는데,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84년 1월 금성반도체가 최종 인수한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1997, pp.108~110). KIET 반도체연구단은 구미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 반도체기술 기반을 확실히 다졌다 그 대표적인 성과를 기술적 측면에서 요약해보면, 무엇보다 먼저 1982년 5μm 실리콘 게이트 nMOS 공정과 1983년 4μm CMOS 공정을 확보 한 점일 것이다. 이 기술은 곧 바로 4bit SRAM, 32K, 64K ROM, 8bit micro-computer 제작에 적용되어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하였다. 다음으로 1983년 1-bit 및 8-bit microprocessor를 설계하였는데, 이는 삼성반도체통신의 4-bit microprocessor 와 함께 우리나라 microcomputer 칩 설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의 현안이었던 VTR  칩의 국산화를 위한 5종의 바이폴라 칩셋을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마지막으로 1983년 VTI 사로  7명의 연구원을 파견, 반도체 자동설계 (CAD: Computer Aided Design)이라는 첨단 설계기술을 습득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CAD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김충기, 1986, pp. 435~444). 한편 삼성은 1983년 3월 반도체의 본격적인 추진을 대외적으로 선언하고 4월 주력제품으로 DRAM을 선정한다. 일단 그룹차원의 방향설정과 품목이 결정되자, 삼성은 무섭게 돌진해 나가 그해 12월 64K DRAM 개발결과를 발표한다. 사업진출 한지 불과 10개월 남짓한 믿기 어려운 짧은 기간에 세계 3번째로 DRAM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비록 일본에 4년 정도 뒤진 기술인데다가 미국 마이크론사의 설계를 도입하여 제작한 것이지만, 64K DRAM의 성공은 반도체 경쟁을 해 볼만하다는 자신감을 각인시켜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자업계의 경쟁사인 금성사도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 등에 자극을 받아 반도체사업을 재검토하게 된다, 금성사는 자사의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반도체 칩의 자체 개발에 주력하면서 트랜지스터 및 아날로그 칩 개발을 추진한다. 또한 1979년 9월 럭키금성 그룹은 대한반도체를 인수해 금성반도체를 창립하고 그해 말인 12월 31일 구미 반도체공장을 완성한다. 84년 KIET 반도체 생산시설을 인수한 금성반도체는 같은 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생산하였고 85년 11월 1M ROM을 개발하여 IBM 컴퓨터 부품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처럼 80년대 초에는 웨이퍼 가공부터 조립까지 반도체 일관 생산체제를 갖춘 곳은 KEC와 삼성 그리고 금성반도체 등 3개사였는데 현대그룹은 다소 늦은 1983년 현대전자를 출범시키며 반도체에 진출한다. 후발주자로서의 어려움을 겪어가며 16K SRAM을 개발 성공한 것은 1984년 12월이다. SRAM의 선택은 나름대로의 특화전략이었지만 DRAM에 비해 복잡도가 훨씬 높은데다가 자체기술만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현대전자는 1985년 바이텔릭사의 기술도입을 통해 16K SRAM, 64K DRAM, 256K DRAM 및 1M DRAM 제조기술 개발에 성공한다. 이처럼 반도체기술 기반이 구축되고 산업체의 반도체 투자가 활발히 전개 되는 시점을 전후해서 반도체인력의 국내 양성은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교육기관으로 반도체 집적회로 실험실을 처음 갖춘 곳은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였다. 1975년부터 1978년 3년간의 고생 끝에 반도체소자제작이 가능한 소규모 연구시설이 구축되어 반도체집적회로의 설계, 제작 및 성능 검증까지 일련의 전 과정을 익힌 전문가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KIET는 KIST로부터 인수받아 그동안 사용해왔던 반도체 제조시설을 1981년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로 기증하게 됨으로써 이 학교는 반도체 제조시설을 확보한 두 번째 교육기관이 된다 (김충기, 1986, pp. 435~444). (다음 소식지에 계속) 도약기 (1984~1997) 성장기 (1998~2013) 전환기 (2014~ )   제3절 반도체산업 미래전망

작성일: 2018-04-05 조회: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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